[이 사람의 연구실] 대한민국 첨단산업, 불소로 뒷받침하다

‘불소화학소재 독립’에 힘을 보태다

2019년 7월 4일, 일본 정부가 기습적으로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우리나라 핵심 산업에 필수 화학물질인 불화수소·불화폴리이미드·포토레지스트의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이 중 불화수소와 불화폴리이미드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불소를 활용해 만든 불소화학소재다. 불화수소는 반도체 제조공정 중 회로의 패턴을 만들고 세정할 때 사용되고, 불화폴리이미드는 OLED 패널과 접거나 구부릴 수 있는 플렉시블 디스플레이를 만들 때 필요한 재료다.
하지만 중요한 불소화학소재의 수출 길을 막음으로써 우리나라 경제에 타격을 주겠다는 일본의 의도는 물거품이 됐다. 국내 각 분야가 전방위적으로 협업해 소재 국산화를 발 빠르게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우리나라 불소화학소재의 발전을 견인해 온 한국화학연구원 계면재료화학공정연구센터와 이곳에서 불소화학소재 연구 및 개발에 전념한 박인준 책임연구원이 있다.
“불화수소는 이미 기술적으로 국산화가 완료된 상태고, 불화폴리이미드의 개발도 거의 종착점에 다다랐습니다. 1990년 센터 설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불소화학소재에만 매달리며 쌓은 경험과 노하우 덕분이죠. 이러한 역량을 인정받아 2019년 말에는 우리 센터가 정부로부터 불소화학소재공정 국가연구실로 지정되기도 했는데요. 저 또한 2001년부터 2018년까지 센터장을 맡으며 우리나라 불소화학소재의 성장에 힘을 보탰고, 지금은 불소화학소재공정 국가연구실 책임자로서 새로운 불소화학소재 개발과 국산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35년 동안 걸어 온 ‘불소 외길’

원자번호 9번이자 지구에서 열세 번째로 풍부한 원소인 불소(F)는 다른 원소와 결합하는 힘이 매우 강하다. 덕분에 불소화합물은 굉장히 안정적인 화학물질인 동시에 내열성·내후성·방수성·절연성·자외선 저항성 등이 우수하며, 충치예방치약, 방수제, 프라이팬, 카메라 렌즈, 2차 전지 바인더, 지구온난화 방지 대체가스 재료 등 생활용품에서부터 친환경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 쓰인다.
“활용 폭이 워낙 넓다 보니 불소화학소재의 국내 시장도 3~4조 원 규모로 꽤 큽니다. 하지만 이 중 9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외화 유출이 상당하고, 불소화학소재를 사용한 제품의 가격도 높아집니다. 불화수소와 불화폴리이미드의 사례처럼 수입 소재를 전략 물자화해서 우리 경제를 압박할 수도 있는데요. 우리 센터와 연구원들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스포츠의류, 우산 등의 코팅제인 발수발유제, 기능성 재료 대부분에 사용되는 과불소알킬알코올, 지문방지제, 불소윤활유, 2차 전지 및 태양전지용 불소수지 제조 공정기술 등을 차근차근 국산화해 왔습니다.”
박인준 책임연구원은 원래 유체역학 전공자였지만, 1988년 한국화학연구원 입사 직후 발수발유제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 불소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마치 운명처럼 불소 관련 각종 과제가 그에게 맡겨졌고, 장장 35년 동안 불소화학소재에만 몰두하며 명실상부 이 분야의 권위자로 거듭났다. 그가 국내 유일이자 최고 수준의 불소화학소재 연구소를 이끌게 된 배경이다.

불소화학소재의 ‘퍼스트 무버’로 나아가다

최근 박인준 책임연구원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불소화학소재 개발 과제는 2차 전지 전극 바인더와 수소차 연료전지용 고체고분자 전해질이다. 2차 전지 전극 바인더는 전기차 수요가 급증하면서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지만, 전 세계적인 원료 수급 및 물류 문제 때문에 값이 4배까지 치솟았다. 한편 수소차 연료전지용 고체고분자 전해질과 촉매층은 100% 수입에 의존하는데 가격이 1kg당 7백만 원에 육박한다. 이들을 국산화한다면 전기차·수소차 시장에서 한 발 앞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일본 수출 규제 직후 불소화학소재 연구·개발·생산을 위한 국가산업단지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후 팬데믹 등이 터지면서 흐지부지됐습니다. 연구자로서 무척 안타까운 일이죠. 첨단 산업에 두루 쓰이는 불소화학소재의 경쟁력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인데 2019년과 같은 일을 또 겪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박인준 책임연구원은 오래 전 KCC와 교류한 적이 있다. KCC의 실리콘 사업 초기에 한국화학연구원의 관련 연구자료를 한데 모아 전달했다고. 이후 실리콘 사업을 성공시키는 모습을 지켜보며 ‘KCC는 뚝심 있는 기업’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는 그는, 앞으로의 사업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자세를 견지한다면 충분히 성공할 것이라며 불소화학소재에도 관심을 기울여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저는 지난 35년간 선진 기술을 따라잡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의 역할을 수행해 왔는데요. 기본 기술을 확보한 만큼 이제부터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려 합니다. 이를테면 중간 화학물질을 보다 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든지 고부가가치 불소화학소재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공정을 개발한다면 이 분야의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죠. 상상만 해도 짜릿한데요. 그 과정 속에서 KCC와 협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기꺼이 손을 맞잡겠습니다.”

박인준 한국화학연구원 계면재료화학공정연구센터 책임연구원

1988년 입사 직후 발수발유제 프로젝트에 참가하며 불소화학소재 연구를 시작했다. 35년 동안 이 분야에만 몰두해 10여 종의 불소계 핵심 소재와 상용화 기술을 개발했으며, 2019년 계면재료화학공정연구센터의 불소화학소재공정 국가연구실 지정을 이끌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를 불소화학소재 분야의 선도 국가로 발돋움시키기 위한 밑바탕을 착실하게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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