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연구실] 유연하고 가벼운 유기 반도체로 반도체 소자 개발의 미래를 점치다

휘어지는 반도체 개발의 단초 ‘유기 반도체’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디스플레이, 착용하거나 부착하는 전자기기는 가까운 시일에 현실화될 기술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예상보다 개발 속도가 더뎌 어떤 난관에 봉착해 있는지 의구심이 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울산과학기술원 에너지화학공학과 백종범 교수팀에 의해 ‘고성능 2차원 유기 반도체 소재 합성 기술’이 발표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연구팀에 의하면, 유기물 구조체로 반도체를 구현하면 가볍고 유연하고 저렴한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유기 반도체는 낮은 전하이동도(mobility: 소재 내부에서 전자나 정공이 움직이는 속도) 때문에 그 쓰임이 제한적이었고, 기존의 실리콘 반도체와 같은 무기 반도체에 비해 성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가볍고 잘 휘어지는 미래적인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기 반도체 소재가 가진 한계를 극복해야 했고, 여러 과학자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2004년 그래핀(Graphene)이 처음 발견돼 반도체 산업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당시 많은 과학자들이 그래핀이야말로 무기 반도체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물질이 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는데, 이유는 그래핀을 반도체로 쓰기에는 부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즉 반도체는 신호에 따라 점(On, 1)멸(Off, 0)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핀은 항상 On만 되고 Off는 되지 않았던 거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많은 물리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그래핀의 화학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었던 겁니다.”
2015년에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구조를 디자인하고 합성에 성공한 C2N이라는 구조체 기술이 개발됐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무기 반도체보다 점멸비가 약 100배나 높았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바로 낮은 전하이동도였다. 이 단점을 해결한 것이 C5N 구조체 기술이며, 백종범 교수는 이를 새로 설계하고 합성함으로써 무기 반도체 수준의 전하이동도와 점멸비를 가진 ‘C5N 2차원 유기 고분자 구조체’를 개발해냈다. 이 사건은 유기 반도체 소자 개발의 전기가 마련된 것으로 반도체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학계와 산업계가 주목하는 연구그룹, 차원조절유기구조체 연구단

유기 반도체는 가볍고 유연한 성질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물성 조절이 용이하고 제조 비용이 낮아 무기 반도체를 대체할 소재로 활발하게 연구돼 왔다. 이번에 개발된 2차원 물질은 구조의 모든 부분이 고리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 기존의 2차원 유기 구조체보다 화학적, 열적 안정성이 높다. 600℃의 고온에서도 견디므로 여러 고온 조건에서도 사용 가능하다. 또한 기존 전도성 고분자인 사슬형 폴리아닐린(polyaniline)보다 전기전도도가 우수하고 염화수소를 도핑(doping: 반도체 안에 소량의 불순물을 첨가해 필요한 전기적 특성을 얻는 일)하면 전도성이 140배 이상이나 높아져 다양한 용도의 전도성 고분자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연구는 국제적인 학술지인 <어드밴스드 머티리얼스(Advanced Materials)>에 게재(2021년 1월)됐다.
“이번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에서 진행하는 개인연구 프로그램 중 가장 사업비가 크고 영예로운 사업인 리더연구자(창의적 연구) 사업의 하나로 차원조절유기구조체 연구단에서 추진됐습니다. 2012년에는 그래핀과 탄소나노튜브 등을 기계화학적 방법을 이용해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상용화 단계까지 성공했고, 이 기술을 활용해 안티몬이 도핑된 그래핀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반영구적인 연료전지 촉매를 개발(2015년 대한민국 10대 과학기술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그래핀의 성능을 능가하는 2차원 다공성 유기 구조체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2016년)됐고, 이를 촉매 지지체로 사용해 세계 최고 효율의 수전해 촉매를 개발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기술을 통해 우리나라가 전 세계 수전해 연구 분야를 선도하고 있고, 수전해 관련 논문 대부분에 인용될 정도로 파급효과가 크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과들로 Google Scholar에서 백종범 교수는 Mechanochemistry(2위), Ammonia(2위), Hydrogen(3위), Polymer Chemistry(19위), Electrocatalysis(27위) 분야의 선두 그룹으로 당당히 자리했다. 2018년부터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상위 1% 연구자(HCR, Claivate Analytics)’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기술력과 생산성 확보의 두 과제를 해결할 방법, 퍼스트 무버 정신

백종범 교수는 관련 분야의 발전 조건으로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정신을 강조한다. 선진 기술을 들여와 국내 인력으로 생산하는 방식은 기술력의 선진국과 값싼 노동력의 개발도상국 사이에서 위기만 가져올 뿐이라고 진단한다. 산학연 모두 새로운 기술 개발에 적극 투자해 우리가 독점해서 미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KCC에는 몇 년 전에 흑연 기반 난연제 기술을 개발할 때 난연페인트 연구를 제안한 적이 있어요. 제게는 익숙한 기업이지요. KCC가 앞으로 발전성과 안정성을 가진 기업으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보다 주인의식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기업 구성원들이 창의적인 도전을 거듭하며 인류의 삶에 기여하는 제품을 선보이는 것이야말로 기업의 목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 백종범 교수가 진행하고 있는 주 연구 분야는 기계화학 암모니아 합성법이다. 지구온난화 해결의 한 방법이자 수소경제 활성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분야다. 이 기술이 지난 100년 전 인류를 기근에서 해방시킨 암모니아 합성법을 능가할 수 있을지 기대감을 모은다. 오늘도 그의 연구실은 가장 일찍 문을 열고 가장 늦게 전등이 꺼진다.

백종범 울산과학기술원 에너지화학공학과 교수

경북대학교 공학석사로 졸업 후, 1994년 국비 장학생이 되어 미국 Akron대학교 고분자과학과에 입학, 1998년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그래핀, 전이금속디칼코겐과 같은 2차원 전자공액형 소재에 화학·구조적 제어를 가능하게 하고, 탄소 원자가 포함된 유기화합물 테트라사이아노퀴노다이메테인(TCNQ)를 고온 반응시켜 자성을 띠는 유기물 자성체(p-TCNQ)를 만드는 등 혁신적인 시도를 통해 다차원 신소재 분야 연구를 선도했다. 또한 개발 기술을 산업계에 적극 이전해 상용화하는 등 국내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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