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금까지 페인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건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재료의 본질과 원물의 특성에 집중하라는 교육을 받으며, 재료의 표면에 ‘의미 없이’ 색을 덮는 것이 죄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건축가들이 항상 검은 옷을 입는 이유가 완벽한 색 조합을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인 것처럼 사실, 색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느꼈던 감정이 아니었을까.
우리 일상의 건축물에서 색을 의미 있게 사용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주변에 흔한 건물들을 살펴보자. 2023년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2022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전 국민의 51.9%가 아파트에 거주한다. 그리고 그 아파트 중 95%는 아이보리 빛이 도는, 또는 회색 빛이 도는 흰색 바탕 위에 몇 가지 파스텔 톤 포인트 컬러가 칠해져 있다. 요즘 신축 아파트들은 금속 패널에 짙은 그레이나 브라운 색상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획일화일 뿐, 개성은 아니다.
다음으로 학교를 살펴보자. 학교 건물들은 대부분 적갈색의 벽돌, 나중에 지어진 곳들은 연갈색의 벽돌을 사용한다. 그리고 건물의 측면 1/3은 ‘창의성과 상상력을 높인다고 주장하는’ 원색으로 도장한 금속 외장재를 반드시 사용한다. 더불어 오늘 출근길에 본 길거리의 작은 건물들은 어떨까? 절반 정도의 비율을 가지는 벽돌, 몇몇 화강석 마감을 제외하면 대부분 외단열 일체 마감 특유의 회색이 섞인 탁한 파스텔 톤의 건물들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원재료의 색상이 아닌 별도의 색을 칠한 대부분의 건물들이고, 놀랍도록 개성 없이 우뚝 솟아 있는 셈이다.
반면 우리 전통 건축에서는 다양한 색을 볼 수 있다. *주된 건축 구조재였던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시작된 단청은 주로 궁궐과 종교 건축에서 권위와 장엄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건물의 주재료는 목재와 석재, 회로 고정돼 있고 구조 또한 동일했으니, 색과 문양을 다르게 칠해 개성을 입히는 것이다. 이는 모더니즘 건축 이전 서양 건축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석조 외벽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채색하거나 벽화를 그려 그 자체로 이야기를 담아내는 커다란 캔버스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공간적 자아를 만드는 색상과 정신적 시공간을 넘나들게 하는 벽화를 이용해 구조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기에 색과 칠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 건축에 이르러 서양에서는 페인트의 기능적, 미적 사용이 더욱 강조되었다. 페인트의 원재료가 합성 화합물로 변하며 내구성이 크게 향상되고, 이는 금속, 유리, 합판 등 새롭게 등장한 대량 생산 재료와 결합해 공간의 깊이와 형태를 강조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이후에는 현대 철학과 결부하여, **마이클 그레이브스와 ***로버트 벤츄리의 예처럼 컨텍스트보다 개체로서의 실존적 의미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다양한 색을 시도했다. 더불어 리차드 로저스의 ‘퐁피두 센터’에서는 구조와 기계, 전기 등 기존에 건물 내부에 숨겨 왔던 것들을 색으로 칠해 외부로 개방하며 기호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한국민속문화대백과 ‘단청 (丹靑)’ 내용 발취 - 글. 광동해 **마이클 그레이브스: ‘포클랜드 시청사’, ‘돌핀 앤 스완 리조트’ 등 다양한 대규모 건축물을 선보이며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이끌어 나간 미국 건축가이자 제품 디자이너. ***로버트 벤츄리: 최초의 포스트모던 건물이라 불리는 ‘바나 벤츄리 하우스’와 더불어 ‘시애틀 미술관’ 등을 설계하며 건축계 노벨상이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
퐁피두 센터의 노출된 구조와 설비 모습 by John Weiss, CC BY-NC-ND 2 / 브라질의 대표적 빈민가 산타 마르타 파벨라 전경 by alobos life, CC BY-NC-ND 2.0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을 지나 1970년대에 모더니즘 건축이 시작됐으나, 이것이 서양처럼 색 사용의 다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급격한 사업화로 인한 실용주의 즉, 오랫동안 페인트를 다시 칠하지 않아도 되는 ‘가성비’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회색과 베이지, 아이보리 등의 때 타지 않는 밝은 뉴트럴 톤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러한 색 사용의 실용성과 소극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요즘 젊은 건축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건물 외벽에 다양한 색상을 시도하고 있지만, 이 역시 몇 가지 유행하는 색에 편중돼 있다. 검정색, 흰색이 도는 적갈색, 시멘트를 닮은 회색, 그리고 베이지와 황토의 중간색 정도. 이런 유행 색상 위주의 사용은 주변 건물의 색과 비슷하게 동화되어, 공간에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시도로 읽힌다. 본인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공간의 넓은 면에 페인트를 칠하는 것을 자제해왔었다. 공공 건축과 민간 주택 위주로 작업을 하며 ‘질리지 않는 공간’을 위해서는 색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마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페인트는 요즘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쉽고 값싼 재료다. 누구나 재료를 구입할 수 있고 공법이 복잡하지 않으며, 힘들이지 않고 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타 마르타 파벨라’의 벽화 지역처럼 지역민의 힘만으로 빈민가를 관광 명소로 탈바꿈 시킬 수도 있다. 이렇듯 누구나 쉽게 공간 정체성을 만들 수 있기에, 적절한 색을 고르기란 힘들다. 단순히 ‘예쁜 것’은 개인의 취향, 유행 등에 의해 수천 가지 디자인으로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칠하는 건축가의 추구와 철학이 담겨야 흐름 밖에서 노닐 수 있으며, 사고로부터 영속성이 부여된다. 모든 디자인에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건축가는 예쁜 것만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며, 공동의 건축물을 만들기 때문에 개인화된 시선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아티스트와도 다르다. 건축가는 색이 주는 의미와 작용까지 치밀한 의도로 계산해서 칠해야 한다. 우리는 무작위로 움직이는 잭슨 폴록이 아니라 그의 작품 15가지를 놓고 나의 의도에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황남인 건축가
서울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으며, 김시홍과 함께 ‘내러티브 아키텍츠’를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건축으로 수렴하여 사고의 맥락을 확장하고자 하며, 인간사와 도시의 복잡한 내러티브를 공간으로 상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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